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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 친척 및 동창

서울시 성북구 장위 1동(우리동네)의 현황

1. 서울특별시 성북구 장위동의 유래

   장위동(長位洞)의 유래는 마을 뒤에 장위산(월곡산)이 있어 이 산의 이름을 따서 붙여진 것이 아닌가 싶다. 일설에는 조선 시대 말기 대신 윤용구가 이곳 남령재에 은거했기 때문이라는 말도 있다. 그는 1895년에 발생한 을미개혁 이후 법부, 탁지부, 내부의 대신으로 10여 회나 임명되었으나 모두 거절하고 장위산밑에 은거하였으며 한일합방 후에 일제가 남작을 수여했으나 거절하였다. 윤용구는 1853년(철종 4)에 출생하여, 1936년에 타게한 조선 말 문신이며 서화가이다. 그의 자는 주빈이며 호는 석촌, 해관 또는 장위산인이라 했으며 본관은 해평으로 부사 윤회선의 아들로 태어나 남령위 의선에게 입양되었다. 윤용규는 1871년(고종 8)에 직장으로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다음 검열을 지내고 여러 벼슬을 거쳐 예조와 이조의 판서를 역임하였다. 그는 글씨와 그림에 모두 뛰어 났는데 특히 해서와 행서 그리고 금석문을 많이 썼으며 죽란을 잘 그렸다. 장위동은 벼슬을 하면 오래한다고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는 설도 있다. 장위동은 조선시대 초에도 장위리라고 불러온 것으로 보아 고려조 때 명신이 이 마을에 있었기 때문에 장위리라고 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조선시대 이곳 주민들은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였으며 벼농사와 조, 수수, 고추 등 흔히 시골 농가에서 재배하는 곡식을 재배하였는데 특산물은 없었다고 한다. 당시 장위동의 농토는 대부분이 윤용구와 그 친척들의 땅이었는데 1960년경부터 윤씨가 일가가 팔아넘기고 또 개척되어 현재 주택지로 변화되었다. 현 장위동 91번지 일대에 동구다리가 있었고, 또 76번지 자리에는 징검다리가 놓여 있었으며 남령재 문 밖에 큰 셤돌이 하나 있었는데 이 다리는 당시 관직의 고하에 따라 하마하는 곳이었다고 한다. 또 장위동 길을 따라 석관동을 통해 태강릉 쪽은 강원도 사람들이 다니던 길목이라고 한다. 

   조선시대 장위동의 자연마을 웃말, 아랫말, 명덕굴, 간대마을, 활량(한량) 등 5개 마을이 합해져서 현재의 장위동이 형성되었다. 1930년대에는 약 250여 호가 살았다고 한다. 장위산(월곡산)은 서울지명사전에 "오패산자락 남쪽끝 봉우리 이라고 명시되어 있으며, 서울시에서 전망좋은 곳으로 선정되어 신년 해돋이 행사와 동내주민이 많이 이용하는 곳이다. 또한 오동근린공원으로 지정되어 둘래길도 잘 정비되어 남녀노소 구분없이 이용하기 좋다.

 

2. 인구현황

      2021년 7월말 현재,

  서울특별시 인구수는 9,558,153명이고,

  성북구 인구수는 433,361명,

  장위 1동의 면적은 0.73㎢, 세대수는 10,482세대, 인구수는 24,131명이다.

 

성북구 구역지도(핑크선 안쪽구역)

성북구 장위1동 지도(핑크선 안쪽구역)

성북구 동위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