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삼문의 업적과 묘소
논산시 가야곡면 양촌리 산 58에 있는 충절의 표상인 매죽헌(梅竹軒) 성삼문 선생의 묘소를 찾았다. 선생의 묘를 흔히 사육신묘로 노량진에 있는것으로 알고 있으나 그 곳은 허묘(虛墓)이다. 이곳에 계신 선생의 묘는 세조로 부터 거열형(車裂刑)을 당해 사지가 찢겨 시신의 일부가 묻힌 일지총(一枝塚)으로 지금은 후손들이 세운 사당과 묘역을 정화하여 편안하게 선생을 안면케 하고 있었다. 묘소 입구에 서있는 묘갈명을 문충공파(선원파) 휘 희순(羲淳)선조께서 쓰신 비문을 보니 더욱 감개가 무량하였다. 참배와 간산을 마치고 나오다가 일행중 한분이 말하길 사당 앞에 있는 능수버들이 선생의 호나 시에 있는 충절을 나타내기에 어울리지 않는것 같다고 하며 소나무나 대나무가 어울리지 않겠냐는 의견에 모두가 공감을 하였다.
성삼문 [成三問, 1418~1456]
본관 창녕(昌寧). 자 근보(謹甫)·눌옹(訥翁). 호 매죽헌(梅竹軒).
시호 충문(忠文). 사육신의(死六臣) 한 사람이다. 1418년(태종 18년) 무관 성승(成勝)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출생시 그의 모친이 꿈에서 '낳았느냐?'라는 질문을 세 번 받았다고 해서 이름은 삼문(三問)이라고 지었다. 1435년(세종 17) 생원(生員)시에 합격하였고 1438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였다. 1447년 문과중시(文科重試)에 장원하였고, 경연 시강관(侍講官), 사간원우사간(右司諫), 집현전부제학(副提學), 예조 참의(參義), 동부승지(同副承旨), 우/좌부승지(右/左副承旨) 등을 역임했다. 그 후 왕명으로 신숙주(申叔舟)와 함께 《예기대문언두(禮記大文諺讀)》를 편찬하고 경연관(經筵官)이 되어 세종의 총애를 받았다.
1442년 박팽년(朴彭年)·신숙주·하위지·이석정(李石亭) 등과 삼각산진관사(津寬寺)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고, 한글의 창제를 위해 정인지(鄭麟趾)·최항(崔恒)·박팽년·신숙주·강희안(姜希顔)·이개(李塏) 등과 함께 요동(遼東)에 유배되어 있던 명나라의 한림학사(翰林學士) 황찬(黃瓚)에게 13번이나 내왕하면서 음운(音韻)을 질의하고 다시 명나라에 건너가 음운 연구를 겸하여 교장(敎場)의 제도를 연구, 그 정확을 기한 끝에 1446년 9월 29일 훈민정음(訓民正音)을 반포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1455년 세조가 단종(端宗)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르자, 1456(세조 2)년 6월 명나라 사신이 귀국하는 환송연 자리에서 아버지 성승(成勝)과 무인 유응부(兪應孚) 등이 국왕 양쪽에서 칼을 들고 지켜 서있는 운검(雲劍)의 기회에 세조일파를 척결하고 단종복위를 계획하였다가 모의에 가담했던 김질(金礩)이 실패를 우려하여 이를 밀고하여 성삼문 등 가담자(박팽년, 유응부, 이개, 하위지 등) 전원이 처벌되었다. 체포되어 친국(親鞫)을 받고 다른 주모자들(박팽년, 이개, 하위지, 유응부)과 함께 작형(灼刑)을 당하였고, 군기감(軍器監) 앞에서 거열형(車裂刑)을 받았다(유성원은 자살). 이어 아버지 승도 주모자의 한 사람으로 극형에 처해졌고, 삼빙(三聘)·삼고(三顧)·삼성(三省) 세 동생과, 맹첨(孟詹)·맹년(孟年)·맹종(孟終)과 갓난아기 등 네 아들도 모두 처형되었고, 여자들은 모두 노예가 되었다.
1691(숙종 17)년에 사육신의 관직이 복구되고 민절(愍節)이라는 사액을 내려 노량진에 민절서원을 세워 신위를 모시게 했다.
그 밖에 홍주(洪州) 노은동(魯恩洞)에 있는 그의 옛집 녹운서원(綠雲書院), 영월의 창절서원(彰節書院), 의성의 학산 충렬사(鶴山忠烈祠), 창녕의 물계세덕사(勿溪世德祠), 연산(連山)의 충곡서원(忠谷書院) 등에 6신과 함께 제향되고 있으며, 1758년(영조 34)에는 이조판서가 추증되었다.
문집에 《성근보집(成謹甫集)》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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