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김씨의 유래(2)
‘삼국사기’에 빠진 고기(古記)의 기록들을 원형대로 전해준다. 고대의 신화, 전설, 민속, 사회, 옛날 말 등등을 금석문(金石文)이나 고적(古籍)에서 인용해 전해준다. 특히 향가(鄕歌) 14수는 다른 문헌에서 찾을 수 없는 귀중한 것이다. 봉모(金鳳毛)는 음보로 관직에 나아갔다. 외국의 방언(方言), 속어(俗語)에 능하여 금나라 사신이 오면 반드시 관반(館伴)이 되어 접대했고, 나라의 대사에는 항상 전례(典禮)가 되어 일을 보았다.
인진사(引進使)에서 판합문사(判閤文事)에 오르고 중서문하평장사(中書門下平章事), 태자태부(太子太傅)에까지 이르렀다. 시호(諡號)를 정평(靖平)이라 하였다. 김약선(金若先)은 김태서(金台瑞)의 아들이며 권신 최우(崔瑀)의 사위다. 그의 딸이 원종비 경순왕후(敬順王后)가 되었다. 추밀부사(樞密副使)를 지냈다.
최우의 부중(府中) 여자드을 망월루 모란방에 모아놓고 음란한 직을 하다가 처형되었다. 김군수(金君綏)는 비명에 간 김돈중(金敦中)의 아들이다. 명종 때 문과에 급제, 직한림원(直翰林院)이 되었다. 고종 5년 거란병이 침입하자 조충(趙冲)의 후임으로 서북면병마사(西北面兵馬使)가 되어 숙주, 영청 등지에서 적을 쳐 4백여명을 죽이고 말 50여필을 빼앗았다. 이듬해 의주에서 한순(韓恂)ㆍ다지(多智) 등이 반란을 일으키자 지중군병마사(知中軍兵馬使)로서 이를 치고, 선무사(宣撫使) 이공로(李公老)와 상의하여 금나라 원수 우가하(亐哥下)에게 서신을 보내 회유, 한순ㆍ다지의 목을 베게 했다. 그러나 앞서 우가하에게 서신을 보낼 때 병마사 김취려에게 알리지 않았다 해서 한남(漢南)(수원(水原))에 유배되었다.
시문에 능하여 보조국사비명(普照國師碑銘)을 찬(撰)하고 그림은 대(죽(竹))을 잘 그렸다.
김숙흥(金叔興)은 은 현종 2년 거란군의 침입 때 전사, 그 공으로 삼한후벽상공신(三韓後壁上功臣)에 추증되었다.
김경용(金景庸)은 숙종, 예종조의 문신(文臣)인데, 문하시중(門下侍中)ㆍ상주국(上柱國)을 지냈으며
협모위사치리공신(協謀衛社致理功臣)이 되었다. 후에 수태사낙랑군개국후(守太師樂浪郡開國侯)에 봉해지고 광국동덕익성공신(匡國同德翊成功臣)이 되었다. 김경손(金慶孫)은 고종 18년 정주분도장군(定州分道將軍)이 되어 몽고군을 대적하여 싸웠다.
고종 24년 광주(光州)등지에서 일어난 이연년(李延年)의 반란을 격퇴시켰고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에 이르렀다.그러나 민심(民心)을 얻은 화근으로 최항(崔沆)의 시기를 받아 백령도에 유배되었다. 김인관(金仁琯)은 예종 때 위위사경(衛尉寺卿)ㆍ검교태자태사(檢校太子太師)를 역임하였다. 김상기(金上琦)는 선종묘정에 배향된 인물이었다.
수사도문하시랑(守司徒門下侍郞), 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를 거쳐 태부(太傅)에 이르렀다. 김혼(金琿)은 왕을 원나라로 호종하여 추성익대공신(推聖翊戴功臣),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에 봉해지고 판삼사사(判三司事)에 이르렀다.
김진양(金震陽)은 고려말의 사대부(士大夫)로 ‘고려사’에 입전(立傳)된 인물이다.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 검열(檢閱)이 되고, 여러 청환직(淸宦職)을 거친 후 서해도안렴사(西海道安廉使)로 부임하였다. 공양왕 2년 이초(彛初)의 옥사(獄事)가 일어나자 그 중대함을 논하다가 이를 경솔히 누설했다 하여 파면되었으나, 다시 기용되었다. 이확(李擴), 이래(李來), 이감(李敢) 등과 함께 조준(趙浚), 정도전(鄭道傳), 남은(南誾), 윤소종(尹紹宗) 등이 변란을 꾸며 민심이 흉흉하다고 상소하여 정도전 일파를 유배시켰다.
그 후 정몽주(鄭夢周), 이색(李穡) 등과 함께 이성계(李成桂)를 제거하려다가 실패, 도리어 귀양가서 죽었다. 김존일(金存一)은 고려말에 장사랑(將仕郞)을 지냈다. 그의 아들 김인찬(金仁贊)이 조선개국공신으로 익화군(益和君)에 봉해지고 양근김씨(楊根金氏)의 시조가 되었는데, 그 후손에서 일부는 경주김씨(慶州金氏)를 이었으므로 후손들이 김존일(金存一)을 파조(派祖)로 하였다.
김장유(金將有)는 고려말에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지내다가 정국이 어지러워지자 보은에 은거하였다. 김천서(金天瑞)는 도학지종(道學之宗)이라 불리었다. 관직이 판예빈사사(判禮賓寺事), 문하좌시중(門下左侍中)에 이르렀다. 고려의 국운이 기우는 것은 인력(人力)으로 붙잡을 수 없다고 하여 관악산에 은거하였다. 상촌(桑村) 김자수(金自粹)는 공민왕 23년 문과에 장원하고 공양왕 때 대사성(大司成)ㆍ세자좌보덕(世子左輔德)이 되었다.
이 때 천변(天變)이 자주 일어나자 숭불(崇佛)의 폐단을 지적하고 연복사탑(演福寺塔)의 중수를 중지하도록 청했다. 뒤에 좌상시(左常侍)ㆍ형조판서(刑曹判書)에 이르렀으나 고려가 망하자 안동에 은거했다. 조선 태종 때 자결했다. 계림군(鷄林君) 김균(金稛)은 고려말 밀직부사(密直副使)를 지냈고, 조선 개국공신 3등이 되어 숭록대부(崇祿大夫)ㆍ의정부좌찬성(議政府左贊成)을 역임했다. 후손이 경주김씨의 대표적인 일문(一門)을 이루고 있다. 김인찬(金仁贊)은 우왕 2년에 북청천호(北靑千戶)였다. 북청(北靑)의 토착세력이었던 듯하며 이성계(李成桂)의 개국 후 중추원사(中樞院使)ㆍ의흥친군위동지절제사(義興親軍衛同知節制事)가 되었다.
죽은 후 개국공신 1등으로 익화군(益和君)에 추봉되었다. 백촌(白村) 김문기(金文起)는 세종 8년 문과에 급제, 이조판서(吏曹判書)에까지 이르렀다. 세조 2년 성삼문(成三問) 등과 함께 단종복위(端宗復位)를 꾀하다가 영월현감(寧越縣監)으로 있던 아들 현석(玄錫)과 함께 살해되었다. 자손들은 각 처로 은신하여 김해김씨(金海金氏)로 행세하고, 수백년을 지내다가 수로왕계(首露王系) 김해김씨(金海金氏)와의 혼동을 피하고자 조정의 윤허(允許)로 경주김씨(慶州金氏)로 환원하였다. 그에 앞서 명종(明宗) 때 5세손 희년(禧年)이 비로소 금고(禁錮)가 해제되었고, 숙종 6년 강화유수 이선응의 상소로 1718년 신원(伸寃), 1731년 복관(復官)되었다.
1791년 장릉홍전(長陵紅箭) 앞에 단을 쌓고 매년 한식(寒食)에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김영유(金永濡)는 세종 29년 문과에 급제,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를 거쳐 개성부유수, 황해도관찰사, 형조참판, 지중추부사를 역임했다. 세조 11년 성절사(聖節使)로, 성종 9년 사은사(謝恩使)로 명(明)에 다녀왔다. 김세민(金世敏)은 한성부윤, 병조판서, 지중추부사를 역임하면서 70여년 동안 관직에 있었는데 7대(代)를 섬겼다. 김정(金淨)은 연산군 10년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중종 2년 문과에 급제하여 부제학, 도승지, 이조참판 겸 홍문관제학을 거쳐 형조판서 겸 예문관제학을 역임했다. 조광조와 더불어 지치주의(至治主義)의 실현을 위해 미신의 타파, 향촌의 상호부조를 위한 향약(鄕約)의 전국적 시행 등 많은 업적을 남겼다.
기묘사화 때 조광조 등과 함께 투옥되었다가 제주에 안치(安置), 후에 사사(賜死)되었다. 시문(詩文)은 물론 그림에도 능하여 새ㆍ짐승 등을 잘 그렸다. 김당(金璫)은 사관(史官)을 지내고, 중종 2년 사간(司諫), 장령(掌令)을 지낸 뒤, 충청도 관찰사를 거쳐 1514년 정조사(正朝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자 호조참판으로 조광조를 숙청하는데 간여했으며, 1523년 진향사(進香使)로 다시 명나라에 다녀왔다. 형조판서, 한성부판윤, 우참찬 등을 지내고 1531년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 호조판서를 거쳐 좌찬성(左贊成) 겸 도총관(都摠管)이 되었다. 시호는 공절(恭節)이다. 김광원(金光遠)은 조광조의 문인으로 중종 때 문장(文章), 행의(行誼)로 천거되어 승문원문습독관(承文院文習讀官)이 되었다. 중종 14년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조광조가 죽자 장흥 월봉산에 들어가 학문에만 전념했다. 김명원(金命元)은 이황의 문인이다. 1561년 식년문과에 급제하고, 선조 2년 종성부사(鍾城府使)가 된 후 내외직을 역임하고 1587년 좌참찬(左參贊)으로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를 겸했다.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을 수습하는데 공을 세워 평난공신(平難功臣) 3등에 올라 경림군(慶林君)에 봉해졌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순검사(巡檢使)가 되고, 이어 팔도도원수(八道都元帥)가 되었다. 1597년 정유재란(丁酉再亂)에는 병조판서로 유도대장(留都大將)을 겸임했다. 좌찬성(左贊成), 이조판서, 우의정을 거쳐 부원군(府院君)에 진봉(進封)되고 좌의정에 이르렀다. 유학에도 전념하여 조예가 깊었다. 김태허(金太虛)는 무과에 급제 후 옥포만호(玉浦萬戶)로 있다가 임진왜란을 만났다. 여러 번 전공을 세웠으며, 경상좌ㆍ우도병마절도사를 거쳐 도총관, 호위대장, 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김여로(金汝老)는 인조조의 무신(武臣)이다.
병자호란을 당한 후 소현세자, 봉림대군이 심양에 볼모로 갈 때 용만(龍灣)8장사(壯士)의 한 사람으로 뽑혀 두 왕자를 수행했다. 그 후 금주위(金州衛), 산해관(山海關) 두전투에서 별시위(別侍衛)로 호종, 1644년 청군(淸軍)이 북경에 입성함으로써 이듬해 귀국 허락을 받은 두 왕자의 소식을 앞질러 조정에 전달했다. 후에 別軍職을 지내고 자산, 덕천의 군수를 역임했다. 김주신(金柱臣)은 숙종(肅宗)의 장인이었다. 문장에 뛰어나 ‘거가기문(居家紀問)’, 수사답록(隨事剳錄)‘, ’산언(散言)‘, 수곡집(壽谷集)’ 등을 남겼다.
김사목(金思穆)(순조조(純祖朝)ㆍ우ㆍ좌의정),
김정집(金鼎集)(헌종조(憲宗朝)ㆍ좌찬성(左贊成)ㆍ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등은 그의 후손들이다.
김정집(金鼎集)의 아들이 고종조(高宗朝)에 대사헌ㆍ양관(兩館)대제학 등을 지낸 김창희(金昌熙)다.
저서로 ‘회흔영(會欣穎)’, ‘석릉집(石陵集)’ 등이 있고 편서에 ‘월성가사(月城家史)’, ‘김씨분관록(金氏分貫錄)’ 등이 있다. 한편 좌의정 김사목(金思穆)의 조카 김영작(金永爵)은 철종(哲宗) 때 대사헌ㆍ이좇마판을 지냈으며 시문(詩文)에 능하여 ‘소정집(邵亭集)’이 전한다. 그의 아들이 유명한 한말(韓末) 총리대신 김홍집(金弘集)이다. 효종(孝宗) 때(1654) 황해도(黃海道)관찰사를 지낸 김홍욱(金弘郁)은 김명원(金命元)과 함께 경주김씨(慶州金氏)를 명문(名門)의 위치에 올려놓았다.
그의 자손에서 3명의 상신(相臣)(영ㆍ좌ㆍ우의정)과 왕비 1명을 배출, 가문의 세력기반을 다졌다. 그의 증손이 김흥경(金興慶)(영조조(英祖朝)ㆍ영의정)이다. 그는 숙종(肅宗) 때 문과에 급제, 승지ㆍ대사간(大司諫) 등을 지내다 신임사화(辛壬士禍) (경종조(景宗朝)에 왕위계승권을 둘러싸고 노론과 소론 사이에 벌인 당쟁)때 파직 당했으나 영조(英祖) 때 즉위 후 도승지(都承旨)가 되고 이듬해 우참찬(右參贊)으로 청(淸)나라에 다녀오기도 했다. 그 후 영조(英祖)의 탕평책에 받대하여 파직되었다가 다시 기용되어 영의정에까지 올랐다. 그의 아들 김한신(金漢藎)은 영조(英祖)의 딸 화순(和順)옹주와 결혼, 월성위(月城尉)에 봉해지고 도총관(都摠管)ㆍ제조(提調) 등을 지냈다. 글씨에 뛰어난 팔법(八法)을 다 잘 썼다.
김노경(金魯敬)은 순조(純祖) 때 문과에 급제, 육조(六曹)의 판서를 두루 거친 명신이다. 그는 순조 말엽에 권력을 전횡했다는 반대파의 탄핵을 받고 헌종(憲宗) 때 강진(康津)의 고금도(古今島)에 안치되었다가 사사(賜死)당했으나 철종(哲宗) 때 관직이 복구되었다. 그는 글씨로 유명했는데 그의 아들이 바로 조선조의 명필 김정희(金正喜)다. 정희(金正喜)는 조선후기의 대표적인 서화가(書畵家)로 이름높은 인물이며, 금석학자(金石學者)로도 일가견이 있었던 인물이다.
자는 원춘(元春)이고 호는 완당(阮堂)ㆍ추사(秋史), 또는 예당(禮堂)이라고도 한다. 순조(純祖) 때 문과에 급제, 암행어사를 거쳐 이조참판 등을 지낸 그는 학문에 있어서는 ‘실사구시(實事求是)’를 주창했으며, 역대 명필의 장점을 연구, 독특한 ‘추사체(秋史體)’를 이루어 예서(隸書)ㆍ행서(行書)에는 전무후무한 새로운 경지를 개척했다. 헌종 6년(1840) 윤상도(尹尙度)의 옥사(獄事)(당시 부사과(副司果)였던 윤상도가 호조판서 박종훈(朴鍾薰) 등을 탐관오리라고 논척(論斥)했다가 왕과 신하를 이간시킨 자라 하여 처형당한 사건)에 연루되어 제주도(濟州道)에 안치되었다가 8년만에 석방되는 등, 전후 13년간 유배생왈을 하는 정치적 파란을 겪기도 했다.
그림은 죽란(竹蘭)과 산수(山水)에 능했는데 사실보다 품격을 중시했으며 선미(禪味)가 풍기는 남종화(南宗畵)의 전통을 이었다. 금석학에도 조예가 깊어 순조(純祖) 16년(1816) 그 때까지 무학태사(無學太師)의 비석으로 알려졌던 북한산비(北漢山碑)가 진라 진흥왕순수비(眞興王巡狩碑)임을 밝혀냈다. 저서로 ‘완당집(阮堂集)’, ‘실사구시설(實事求是說)’, ‘금석과안록(金石過眼錄)’, ‘표장재시고(票掌齋詩稿)’ 등과
서화(書畵)로 ‘묵죽도(墨竹圖)’, 묵란도(墨蘭圖)‘ 등 많은 작품이 전한다. 김명희(金命喜)는 추사(秋史)의 아우이다. 순조 10년 진사(進士)가 되었고 벼슬은 현령(縣令)에 그쳤다.
1822년 동지겸사은사(冬至兼謝恩使)의 일행으로 가는 아버지를 따라 북경에 가서 ‘해동금석원(海東金石苑)’의 저자인 유희해(劉喜海), 진남숙(陳南淑) 등과 교분을 맺고 귀국 후에도 그들과 편지, 글씨를 교환했다. 형과 함께 글씨가 뛰어났다. 김홍집(金弘集)은 구한말 개화파의 한 인물로 갑오년 농민전쟁 후 이루어진 갑오경장의 주역이다. 고종 5년 정시문과(庭試文科)에 급제, 광양현감을 거쳐 예조참의가 되었다. 예조참의였을 때 (1880년) 수신사(修信使)로 일본에 다녀오면서 중국인 황준헌(黃遵憲)이 쓴 ‘조선책략(朝鮮策略)’을 가지고 와서 왕에게 바쳤다. 이에 개화를 반대하는 보수적인 유학자들의 척사운동(斥邪運動)이 전국적으로 일어나자 책을 소개한 책임을 지고 사직했다.
1882년 구미열강의 통상요구와 임오군란의 뒤처리 등 복잡한 국제문제에 부딪친 정부에 다시 기용되어 한미, 한영, 한독 등 수호조약 체결의 부사(副使), 제물포조약 체결의 부관(副官)으로서 외교수완을 발휘, 경기도관찰사로 승진되었다. 1884년 예조판서ㆍ한성부판윤을 역임하고 갑신정변이 일어나자 우의정ㆍ좌의정 등으로 전권대신이 되어 한성조약을 체결한 뒤에 사임,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로 한직(閑職)에 머물러 있었다.
1894년 양이배척, 보국민안(輔國民安)을 내세우고 농민전쟁이 발발하고 이어서 일본의 조선 침략이 표면화되었다. 이 때 일본의 힘을 빌어 제 1차 김홍집 내각을 조직, 총리대신이 되었다. 청일전쟁의 결과 일본의 우위가 인정되어 일본의 강요로 강력한 친일파가 입각(入閣)함으로써 제 2차 김홍집 내각이 조직되었다.
이 때 총리대신으로 홍범(洪範) 14조를 발표하는 등 새로운 국가의 체계를 세우고 갑오경장(甲午更張)을 수행했다. 그러나 재정난과 박영효(朴泳孝), 서광범(徐光範) 등 극단적 친일파와의 대립으로 내각은 와해되고 박정양(朴定陽) 내각이 탄생했다. 1895년 일본은 자신들의 세력만회를 위해 을미사변을 일으켜 명성왕후를 죽인 후 다시 김홍집 내각을 개편하였다. 이때 그들은 일본의 세력을 등에 업고 단발령의 강행 등 과격한 개혁을 실시, 전국에서 봉기한 의병의 규탄을 받았다. 1896(건양 1)에 아관파천으로 친로파 내각이 조직됨으로써 김홍집 내각은 무너지고 많은 대신들이 피살되었는데, 이 때 그도 성난 민중에 의해 광화문에서 살해되었다. 구한말 제국주의의 세력이 조선에 밀려오는 가운데, 조선의 갈길을 두고 개화파, 수구파 드으이 정치세력이 형성되었다. 김홍집이 개화파의 일원으로 세 차례나 내각을 조각, ‘갑오경장’을 비롯한 근대적 개혁을 시도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추진의 힘을 조선(대한제국) 자체의 힘에 의지하지 않고 외세를 끌어들여 성급하게 근대화를 추진하려 함으로써 결국 외국의 식민지로 전락하는데 한 역할을 담당했을 뿐만 아니라 해방 후인 오늘에까지 큰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김춘희(金春熙)는 김영작(金永爵)의 손자이며 김홍집(金弘集)의 조카다. 고종 20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1894년 갑오경장으로 숙부 김홍집이 내각을 조직할 때 개화파로 황해도관찰사에 임명되었고, 1895년 학부협판(學部協辦), 1907년(융희 1)특진관(特進官), 뒤에 승녕부대종장(承寧府待從長)이 되었다. 김교신(金敎臣)은 일제시대에 함석헌, 송두용, 정상훈 등과 ‘성서조선(聖書朝鮮)’을 발간, 신앙운동으로 독립사상을 고취시켰던 종교인이었다 .
제 2차 대전 때 흥남 질소비료 공장에 끌려가 강제 노동을 하며 동포들에게 신앙운동과 독립정신을 계몽하다 전염병으로 죽었다. 김용원(金庸源)은 3ㆍ1운동 후 상해(上海)로 망명, 임시정부 경무원 등을 지냈으며 대동단(大同團)을 창설, 항일운동을 벌이다 붙잡혀 옥사했다. 대종교(大倧敎)(환인(桓因)ㆍ환웅(桓雄)ㆍ단군(檀君) 등 삼신을 받드는 우리나라 고유의 종교) 대주교였던 김교헌(金敎獻)은 1917년 일제의 탄압을 피해 서울에 있던 대종교 총본사를 만주(滿洲) 화용현(和龍縣)으로 옮기고 시베리아ㆍ몽고ㆍ중국 각지에 교당을 설립해 민족신앙을 바탕으로 한 독립운동을 폈다. 3ㆍ1운동 후 일본의 대대적인 독립군 공격작전으로 수만의 교도가 학살당하는 변고를 만나 비분과 과로로 병을 얻어
윤세복(尹世復)(제 3대 교주)에게 교통(敎統)을 유서로 전하고 구월산(九月山) 삼신사(三神祠)에서 자결, 순국(殉國)했다. 김준(金準)은 광무(光武) 10년(1906) 나주(羅州)에서 김제율(金弟律) 등과 함께 의병을 모아 광주(光州) 등에서 항일에 앞장섰던 의병장이다. 호남차으이회맹소의 선봉장이 되어 고창, 광주, 동복 등지에서 싸웠다. 그는 한 대 창평을 점령했으나 체포된 동료를 구출하기 위해 일본군을 추격하다 전사했다.
경주김씨 상촌공파 행렬도
경주김씨 상촌공파 행렬도
김알지 21대(김상촌 13대) 漢○ 김알지 22대(김상촌 14대) ○柱
김알지 23대(김상촌 15대) 魯○ 김알지 24대(김상촌 16대) ○載
김알지 25대(김상촌 17대) 商○ 김알지 26대(김상촌 18대) ○濟
김알지 27대(김상촌 19대) 東○ 김알지 28대(김상촌 20대) ○煥
김알지 29대(김상촌 21대) 基○ 김알지 30대(김상촌 22대) ○鍾
김알지 31대(김상촌 23대) 淵○ 김알지 32대(김상촌 24대) ○稙
김알지 33대(김상촌 25대) 丙○ 김알지 34대(김상촌 26대) ○圭
김알지 35대(김상촌 27대) 善○
경주김씨 상촌공파 (桑村公派)의 역사
경주(慶州) 김씨(金氏)의 대보공(大輔公)은 김알지(金閼智)에서 시작된다. 김알지는 65년 신라 탈해왕 9년 금성(金城) 서쪽 계림(鷄林)의 나무 끝에 걸려있던 금궤에서 태어났다. 탈해왕은 이를 기뻐하며 성을 “김”(金)으로 하사 했는데 이것이 경주 김씨의 시작이다. 경주 김씨는 대보공의 후손 미추(味鄒)가 조분왕(助賁王)의 사위로 후사(後嗣)없이 승하하자 첨해왕(沾解王)이 뒤를 이어 신라 13대왕에 오르면서 신라의 왕성(王姓)이 되었다. 그 후 경순왕(敬順王)이 고려에 손국(遜國)할 때 까지 신라 56명의 왕중 38명의 왕(王)을 내어 삼한(三韓)의 대표적인 성씨를 이루었다. 경순왕의 13대손 태사공(太師公) 김인관(金仁琯)은 고려시대 문과에 급제하고 덕녕부주부(德寧府注簿)를 제수받았다.
우왕(禑王) 초에 정언(正言)이 되었는데 왜구(倭寇) 토벌의 공으로 포상받은 경상도 도순무사 조민수(曺敏修)의 사은편지에 대하여 회답하는 교서를 지으라는 왕명을 받았으나 그가 전날 김해, 대구에서 있었던 왜구와의 전투에서 비겁하게 도망하여 많은 병사들을 죽게한 사실을 들어 거절한 죄로 전라도 돌산(突山)에 유배되었다. 하지만 상촌은 뒤에 교부령(典校部令)을 거쳐 판사재시사(判司宰時事)가 되고 공양왕(恭讓王)때는 대사성(大司成), 세자좌보덕(世子左輔德)이 되었다.
이때 상촌(桑村)은 ‘왕대비에 대하여 효성을 다 할 것과 왕세자의 봉숭례(封崇禮)를 서두르지 말 것’,
‘사전(祀典)에 기재된 자를 제외하고는 일체의 음사(淫祀)는 금지하고 모든 무당의 궁중출입을 엄단 할 것’,
‘천변이 자주 일어나는 것은 숭불(崇佛)로 인한 것이니 연복사탑(演福寺㙮)의 중수공사를 중지 할 것’,
‘언관(言官)의 신분을 보장할 것’ 등의 상소를 왕에게 올렸다.
1392년(태조 1) 판전교시사(判典校時事)가 되어 좌상시에 전보되고 충청도 관찰사, 형조판서에 이르렀다. 고려말 상촌은 정세가 어려워지자 일체의 관직을 버리고 고향인 안동 금곡동에 은거하여 유유자적 했다. 조선이 개국된 뒤 태종이 형조판서로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고 자손에게 묘갈(墓碣)을 만들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자결하였다. 상촌은 이숭인(李崇仁), 정몽주(鄭夢周) 등과 친분이 두터웠으며 문장이 뛰어났다.
배위(配位)는 정부인(貞夫人) 안동 권씨이다. 그의 11대손 저(箸)는 이곳 영남의 봉화군 춘양면 숫골의 낙향시조로 창릉참봉(昌陵參奉)을 지냈으며 배위는 청주 한씨이다. 12대손 태중(兌重)은 호는 백운이며 가선대부(嘉善大夫)로 배위는 윈씨이다. 묘소는 원주 외남송리 자좌 쌍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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