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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 및 여행

개태사(開泰寺)

개태사(開泰寺)

 

 

 

 

망국의 한을 품은 고려 태조 왕건이 세웠던 개국사찰 논산 천호산 개태사

 

 

논산가는길에 위치한 이곳은 조금은 훵해보이기는 하지만 나름 역사를 가지고 있는곳이다. 이곳은 고려 태조 19년 (936)에 창건된 사찰로 왕건이 후백제를 평정하고 세운 국립 개국사찰이다. 이곳은 지금은 별다른 요충지처럼 보이지는 않지만 이곳 일대는 요즘 유명해진 계백이 5,000의 결사대를 이끌고 전쟁을 한 황산벌이 근거리에 있다. 특히 군사나 교통적으로 요충지로 이름이 난곳이다. 예전에는 이곳 주변으로 6km에 이르는 토성이 있는데다가 승병도 주둔이 가능했다고 한다.  

 

논산에서 대전으로 향하는 국도변, 천호산(386m) 기슭에 위치한 개태사는 이규보 선생이 쓴 개태사 조전원문(이규보의 이상국집에 수록됨)과 《고려사》와 《여지도서》에 에 의하면 고려 태조19년(936)에 창건된 사찰로 왕건이 후백제를 평정하고 창건케한 국립 개국사찰이라고 나와 있어 역사적 사실을 증명해주고 있다. 개태사는 고려 태조 19년(936)에 연산(連山, 지금의 논산시 연산면) 천호산(天護山, 원래이름은 황산)에 짓기 시작하여 23년 12월에 완공한 화엄종 사원이다.

 

개태사가 자리잡은 곳은 원래 고려 태조가 후백제의 신검과 최후의 일전을 벌였던 일리천(一利川) 전투의 주요한 전장이었고, 더 거슬러 올라가서는 나당연합군과 계백이 운명을 건 한판 승부를 벌였던 황산벌과도 인접하였다. 후삼국 통일 직후 후백제의 견훤이 황산(黃山,지금의 연산)의 작은 절에서 병으로 죽었는데, 이 절이 개태사자리라는 설도 있다.

 

태조는 후백제를 멸망시킨 후 이를 기념하고자 최후의 전승지 자리에 개태사를 세웠는데, 여기에는 후백제의 자취를 없애고, 후백제민을 위압하려는 의도가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더 나아가 하늘의 도움을 입어 고려를 건국함으로써 전란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나 통일의 시대를 열어간다는 의미를 상징한다는 점이 주목된다. 이는 ‘하늘이 수호하셨다는’뜻의 산 이름인 천호(天護)와 ‘태평한 시대를 연다’는 뜻의절 이름인 개태(開泰)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이 절에는 나중에 태조의 초상화를 봉안한 진전(眞殿)이 세워져 왕실의 조상숭배를 통해 왕실을 보호하는데 있어 특별한 기능도 담당하였다. 고려가 홍건적과 왜구에게 시달렸던 공민왕 11년(1362)~12년에는 이인복(李仁復)을 개태사의 태조 진전에 보내어 그곳에서 천도와 환도의 길흉을 점치어 묻게 하였고, 고려 멸망 직전인 공양왕 3년(1391)에는 태조 진전에 제사를 지내고 옷과 옥대를 바친 기록이 있다.

 

한편 주지 임명 사례를 살펴보면 고려 전기인 예종(재위 1105~1122) 때에는 예종의 동생인 원명국사 징엄(圓明國師澄儼)이 교종(敎宗)의 최고 승계인 승통(僧統)을 가지고 있으면서 주지를 맡을 정도였으나, 고려 말인 우왕(재위 1374~1388)때에는 두번째로낮은 대사(大師) 급이 주지를 맡았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같이 개태사 주지의 승계가 하락한 까닭은 고려후기에 화엄종 세력이 전반적으로 약화되어 고려 불교계내에서 개태사가차지하는 비중이 전기에 비해 낮아졌을 수도 있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대로 개태사(開泰寺)는 태조의 진전이 있어 왕실과 관련한 길흉을 점치고, 제사를 지냈을만큼 왕실과 깊은 인연을 맺고 있었던 중요한 사찰이었다. 개태사는 고려 태조가 후백제와 최후의 결전을 벌인 후 이를 기념하기 위해서 태조 19년(936) 격전지에다 세운 사찰이다. 이 삼존석불(석조여래삼존입상 : 보물 제219호)은 그 당시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중앙의 본존불은 민머리에 얼굴이 둥글지만 평면적이고 귀는 길게 늘어졌다. 어깨와 가슴은 투박하게 만들었으며, 오른손은 가슴에 들고 왼손은 배에 대어 무엇을 잡은 것처럼 만들었는데 지나치게 둔중하다.  왼쪽의 보살상은 머리 부분이 없어진 것을 복원한 것이다. 본존불보다 조각이 화려하고 섬세한 편으로, 어깨와 가슴이 좀더 부드럽고, 팔찌와 천의(天衣)자락에 장식무늬가 표현되어 있다. 오른쪽의 보살상은 왼쪽의 보살상과 거의 같은 수법으로 얼굴이 역사다리꼴이고, 목에는 두터운 삼도(三道)가 있다.

단정하면서도 통통한 몸집, 큼직한 두 손과 부피감 있는 팔, 다소 두꺼워진 천의와 선으로 새긴 옷주름 등은 통일신라보다 진전된 고려 초기의 새로운 양식적 특징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후삼국 통일을 기념하여 만든 작품이다.

 

 

개태사석조삼존불상 [開泰寺石造三尊佛像]고려 불상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 천호리 개태사에 봉안되어 있는 고려의 삼존석불입상.

보물 제219호. 본존상의 높이 415㎝, 우협시보살상 346㎝, 좌협시보살상 349㎝. 개태사는 936년(태조 19) 태조가 후삼국통일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절이므로 이 삼존불상은 개태사 창건 당시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보수 전의 모습은 〈조선고적도보 朝鮮古蹟圖譜〉 14권에 있는 사진으로 볼 수 있는데, 우협시보살상만이 완전한 상태이고 본존상과 좌협시보살상은 다리 부분만 남기고 절단되어 있었다. 1934년 중창 때 없어진 부분이 발견되어 복원되었는데 좌협시상의 머리 부분만은 당시에 발견되지 않아 새로 만들어 얹혀졌다. 그뒤 1988년 법당의 해체·복원 때 좌협시의 머리가 발견되어 새로이 얹혀지면서 개태사삼존불은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삼존불 중 좌협시상의 표현이 가장 뛰어나고 개성이 있으므로 좌협시상만 개태사 창건 당시에 만들어진 불상이고, 본존상과 우협시상은 후대에 좌협시상을 모본으로 하여 복원된 불상으로 추정되고 있다.

 

좌협시상은 부드러우면서도 탄탄한 양감과 천의나 팔찌 등에서 보이는 장식적인 표현이 어울어져 매우 신선한 느낌을 주는 상이다. 머리에는 높은 보계(寶髻)가 있는데 머리카락의 표현이 생략되어 밋밋하고, 이마 위에만 동글동글하게 앞머리가 표현되어 있다. 보관을 썼던 것으로 추정되나 지금은 없다. 온화한 얼굴표정에 코와 입을 작게 조각해 얼굴 아랫부분이 풍만해 보인다. 귀는 양어깨에 닿을 정도로 길며 굵은 띠 모양의 머리카락이 귀 중간 부분을 지나고 있다. 이러한 얼굴모습과 머리표현은 고려초 불상으로 추정되는 강릉 한송사지(寒松寺址) 대리석보살상, 신복사지(神福寺址) 석조보살상과 매우 비슷하다. 불신은 다소 육중하게 보일 정도로 힘있는 양감이 표현되었으며, 천의가 가슴 위에 대각선으로 걸쳐 있고 허리 아래에만 군의(裙衣)를 입고, 꽃 모양이 장식된 화려한 팔찌를 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통일신라 이래의 보편적인 보살상 형식과는 달라서 허리에서 늘어지고 있는 군의자락이 마치 앞치마처럼 표현되었다든가 옷에 꽃무늬[花紋]가 장식되어 있는 등 세부적인 표현에서 도식화나 장식화의 경향이 보인다. 손은 육중한 크기에 비해 부드럽고 사실적인 표현이 보이지만 발은 각이 지고 투박하다.

 

우협시상은 좌협시상과 거의 같은 모습을 하고 있어 한 짝을 이루는 보살상으로 알려져왔으나 1988년 좌협시상의 머리가 발견된 이후 두 상을 비교해보면 우협시상의 조각솜씨가 현격히 떨어진다. 불신은 굴곡이 없이 기둥처럼 표현되어 탄력있는 양감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얼굴에도 부드러운 양감이 없으며 손도 뭉툭하게 형태만 표현하고 있다. 옷의 표현에서도 기본적인 형식은 좌협시상과 같으나 선각으로 표현되어 있고, 곳곳에서 편의적인 표현이 보인다든가 치마자락에 있는 꽃무늬장식이 생략되는 등 좌협시상을 모방한 상임을 알 수 있다. 상전체의 조형성에 있어 당당한 느낌이 별로 없다. 본존상은 우견편단(右肩偏袒)의 여래입상으로 납작한 세모형의 얼굴이 우협시상과 비슷하다. 귀가 몹시 커서 어깨까지 늘어져 있으며 여래상인데도 특이하게 귀에 보발(寶髮)이 표현되어 보살상을 모방했다는 느낌을 준다. 보발은 원래 보살상에서만 볼 수 있는 특징으로, 좌우협시보살상과는 흘러내리는 방향이 반대로 표현되어 있다. 이와 같은 도상에 대한 부정확한 이해는 개태사 창건 당시의 본존상에서는 있을 수 없는 것으로, 이 본존상이 후대에 좌협시상을 모본으로 하여 다시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잘못 표현된 것이 아닌가 한다. 굴곡이 없는 기둥같은 불신에 옷주름도 몇줄의 납작한 주름으로 간략히 표현했으며 두 손도 유난히 크고 뭉툭하다. 본존상임에도 불구하고 좌협시상에 비해 조각솜씨가 월등히 떨어진다.

 

이와 같은 양식 파악은 개태사가 심하게 파손된 적이 있었고 이후 대대적인 중창이 있었음을 짐작하게 해주므로 어느 때인가 좌협시상을 모본으로 하여 본존상과 우협시상이 복원된 것으로 생각된다. 앞으로 개태사지에 대한 전면적인 발굴을 통해 보다 명확히 밝혀질 것으로 기대된다.

金春實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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